조아 기프트 닷컴 고구려(高句麗) 또는 고려(高麗)는 고대 한반도 삼국시대 세 나라 중 북쪽에 위치했던 군주제 고대 국가이다.

🎁기프트💖조아✨닷컴
#조아기프트닷컴 #조아닷컴기프트 #기프트조아닷컴 #기프트닷컴조아 #닷컴기프트조아 #닷컴조아기프트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전성기에는 한반도 중・남부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나라로, 삼국 가운데 가장 큰 영토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를 통틀어도 발해와 함께 1, 2위를 다투는 국가였다. 광개토대왕~장수왕으로 대표되는 100년간의 최전성기에는, 하술하듯이 아시아 전체로 넓혀도 중국과 대결이 가능한 몇 안되는 나라였다. 신라(992년) 다음으로 긴 기간(705년) 존속한 장수 왕조이기도 하며, 같은 시기 중국에서는 전한, 후한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많은 국가가 등장하였다. 더 나아가 신라가 내물 마립간 이전까지는 단일 국가로 보기 힘들었고 내물 마립간 시대 전후로 국가 체제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근거로 서로 다른 나라라고 보는 관점을 채용한다면 시작부터 끝까지 왕조를 주몽계 세습체제로 유지하고 빠르게 중앙집권을 이룬 고구려[38]를 한국사 역사상 최장수 왕조로 볼 수 있다.
건국 초기에는 국명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고구려(高駒驪), 구려(句麗), 구려(駒驪), 고리(高離) 등으로 기록되었는데 주로 고구려(高句麗)의 빈도가 가장 높았다. 당연하겠지만 이는 고유어 이름을 한자를 빌려 나타내는 과정에서 여러 표기가 나타났다가 점차 '고구려'로 통일된 것이다. 고구려의 기원과 관련되어 졸본부여나 '맥'(貊)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4세기부터는 '고려'(高麗)로 불리기 시작하여, 5세기에 이르러서는 '고구려'라는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고려'로만 불리게 되었다.
현재 사학계의 정설은 장수왕 때 고구려가 고려(高麗)로 고정되어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아 한국의 비전문가들 사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듣보잡인 경우가 많다. 장수왕 때 고려로 국호를 바꿨다는 증거들은 여럿 있다. 가령 5세기 장수왕 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 고구려비에는 고려라는 두 글자가 떡하니 박혀 있고, 장수왕 시기부터 중국 측 문헌에 '고려'라고만 표기되기 시작된다. 전성기를 맞이한 장수왕 재위기에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는 등 국가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여러 정책들이 추진됐는데, 국호 역시 그 일환으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왜 바꾸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무래도 고구려(高句麗)의 고(高)와 구(句)의 발음이 비슷해서 빨리 발음하면 고려(高麗)나 구려(句麗)로 줄어들게 되는데 구려보다는 고려가 한자의 의미를 봤을 때, 물론 어원은 한자의 의미와 무관한 고유어에서 유래했겠지만 더 그럴 듯해 보여서 고려로 변경했을 수도 있다.[49] 고구려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한서》 〈지리지〉에서는 현도군의 속현으로 고구려현과 함께 상은태(上殷台)현과 서개마(西蓋馬)현이 소개되는데, 이 둘은 전부 방위어인 상(上)과 서(西)로 시작하므로 고구려 역시 본래 방위어 고(高)와 토착 지명 구려(句麗)의 합성어였을 것으로 보인다.[50] 이렇게 본다면 국호가 '고려'로 변경된 것은 의도하진 않았지만 국명의 본래 형태와 유사하게 돌아온 셈으로 볼 수 있다.
이 '구려(句麗)'의 정확한 어원은 불명이나, 가장 유력한 설은 《삼국지》 〈동이전〉에 소개된 성(城)을 뜻하는 고구려의 고유어 '구루(溝漊)' 및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고구려 지명에서 역시 성의 의미로 자주 사용된 '홀(忽)'과 연관짓는 것이다.[51] '高'에 대해서는 '크다'로 보고 '대성(大城)'으로 해석하는 견해[52], 상(上)을 뜻하는 '솔/수리/술/소리'의 훈사(訓寫)로서 수도를 뜻하는 '수릿골·솔골(首邑, 上邑)'로 보는 견해[53], 구려족이 고(高)씨를 칭하며, 자신의 성을 고구려(高句麗)라고 부른 것에서 연유하였다고 보는 견해[54] 등이 있다. 한편 조영광(2015)는 '구려'가 원래는 '나라(國)'를 뜻하였으나 국가가 점차 성장하면서 '성(城)'을 의미하는 단어로 변화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장수왕 이래로 고구려를 고려라고 불러왔던 탓에, 5대 10국 시대와 북송을 거친 이후부터 전근대까지의 중국과 일본에서는 왕건이 세운 고려도 고구려가 거의 그대로 이어지되 왕조만 바뀐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송나라 사신이 쓴 《고려도경》에서도 중세의 고려를 고씨 고려가 망하고 왕씨가 일어나 세운 고려라 표현했으며, 중국 역사학자들이 종종 이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오늘날 한국에서 쓰듯이 고구려, 발해, 고려 등으로 부른다.
현대에 로마자로 표기할 때는 2000년 이전 남한의 로마자 표기법과 거의 유사한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및 북한식 표기법을 따른 Koguryŏ와 남한식 표기법을 따른 Goguryeo 두 가지가 쓰인다. 남한 매체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은 높지만 2000년 이전 남한에서 생산된 문헌에다가 고구려 자체가 현 북한 지역에서 기반한 왕조였다보니 두 표기법의 저명성은 엇비슷한 편이다.[55]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서에서는 북한과 중국의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으므로 Koguryŏ로 표기했다.
왕씨 고려 때는 구고려(句高麗)[56], 구려(駒驪)[57]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자국을 고구려의 고려에 맞춰 후고려(後高麗)[58]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아예 고구려와 고려를 동일시하여 고구려를 우리 고려[我高麗]라고 부르는 축문도 등장한다.[59]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의 초창기 이름이 후고구려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냥 고려였다가 겨우 3년만에 버리고 나중에 마진, 태봉으로 바꾼 것이었다. 왕건이 세운 나라 고려는 궁예의 태봉을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였으며 고구려를 계승했다는걸 표방하기 위해 국호를 고려로 정한 것이다. 일본에서 발견된 외교문서에서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도 고려라는 이름을 사용했음이 나타난다. 사실 발해라는 국호는 당과의 협상에서 어쩔 수 없이 합의된 대외용 국호였고, 잠시 국호를 고려로 사용한적이 있으나 워낙 발해라는 국호 사용 빈도가 평소에도 훨씬 높다보니 발해인들 스스로도, 적어도 요나라 시대 후기, 금나라 때부터는 본인들이 발해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된다.[60]
이외에도 고구려 유민 고모의 묘지명(高牟墓誌銘)에 따르면 별칭으로 동해지동(東海之東, 동해의 동쪽), 한향(韓鄕)이라 부르기도 했고 삼한=삼국으로 여겨지면서[61] 그 중 마한에서 유래했다고 여겨 그냥 마한이라 불리기도 했다.[62] 근데 보통 고구려는 마한과 동치되긴 했지만 이게 좀 어지러워서 진한이나[63] 변한[64]으로 불리기도 했다.
출처: namu.wiki